8월 초, 삼도수군통제영
통영은 바닷가의 도시여서 그럴까
휴가철이 겹치니 좁은 도로에 수많은 차량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을 방문하기 위해,
통제영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싶었으나
진입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차량들이 늘어서 있었다
충렬사 방향으로 조금 올라 오자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문화 주차장에
자리가 있어 주차를 할 수 있었다
1시간에 1,600원이었는데
이곳저곳을 빙빙 도느니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백배는 나아 보였다
세병관을 가거나 충렬사를 간다면,
중앙에 위치한 이곳 주차장도 괜찮아 보였다
모두 걸어서 다닐만한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을 향해
입구에 오니, 꽃나무가 반기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사적 402호로써
삼도수군통제사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의 지휘 본부였다
제6대 이경중 통제사가 1604년, 중앙절인
음력 9월 9일 터를 잡은 조선 최초의 군사계획도시이자
지명 '통영'의 유래이다
이순신 장군의 필승 전략을 본받아 통영 앞바다에서
삼도수군과 군선이 모여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제1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한산섬 진영이다
조선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겹쳐 보이는듯한 효과가 있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통영성 입구가 나온다
통영성은 1678년 (숙종 4) 제57대 윤천뢰 통제사가
본영 방어를 위해 쌓았다
성 둘레가 대략 3.6km, 높이가 4.7m 정도 되었다
성에는 관아 100여 채, 4대문, 2암문, 3포루, 3지(연못),
9정 (우물)이 있었다 현재 12공방 등 관아 일부와 3포루가
복원되었다
조선시대에 군인이었다면,
저곳에서 쳐들어 오는 적군들을
감시했어야 했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조선 후기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해상 방어 총사령부이다.
선조 26년 (1593)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겸임하게 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이 처음 생겼다.
이 삼도수군통제영을 '통제영'으로 줄여 부르던 데에서 통영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최초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의 한산 진영이다.
지금의 통제영은 선조 36년 (1603)에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운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으나,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통제사의 정식 명칭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을 총괄하는 조선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통사, 통수, 통곤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1593년 (선조 26년)부터 1895년 (고종 32년) 폐영 될 때까지 303년간 209대, 재임 14명으로 195명의 통제사를 배출하였다.
제1, 3대 통제사 이순신, 제2대 원균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종 2품)는 각 도의 수장인 관찰사 (군권, 행정권, 사법권을 가진 종 2품)와 대등한 관계였으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권한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 전체 병력의 1/4 이상에 해당하는 조선 수군 80%가량의
삼도 수군을 통솔하는 막강한 군권, 사법권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통제영 운영을 위한 군액 (세금) 징수,
통영곡 (군량미) 운영, 소속 전선(배)을 이용한 물류업과 지역별 창고업, 상평통보 자체 제작과 사용, 12공방 운영 등을 통한
든든한 재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초상화가 남아있는 통제사들의 연혁이 적혀있었다
1대, 3대 통제사 이순신 (1593.8-1597.2 // 1597.8-1598.11)
99대 이복연 (1726.12-1727.12)
117대 통제사 이장오 (1755.3-1755.7)
120대 통제사 이윤성 (1759.10-1760.2)
127대 통제사 이국현 (1769.1-1771.1)
132대 통제사 조완 (1775.4-1776)
134대 통제사 이창운 (1777.5-1778.6)
139대 통제사 이방일 (1785.1-1786.1)
매표소에서 표를 산 뒤, 망일루라고
적힌 곳으로 입장하면 된다
입장권은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초등학생 1,000원
단체는 20%의 감면이 있는데, 단체가 아니더라도
조선군선, 통영 케이블카, 통영수산과학관,
청마 문학관 당일 관람권 소지자는 20%의 할인을 해 준다
만 6세 미만 (미취학 아동)과 만 65세 이상인 사람
공무수행자, 군인, 통영 시민,
그 외 기초생활수급자, 국가 유공자, 5.18 유공자,
병역면문가 예우 대상자, 의사자 유족 및 의상자 등과
가족 혹은 동반인은 무료다
단, 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
월별로 11월 ~ 이듬해 2월은
매표 시간이 9:00 ~ 17:00
관람 시간은 9:00 ~ 17:30
3월 ~ 10월
매표 시간이 9:00 ~ 17:30
관람 시간은 9:00 ~ 18:00
참고하여 방문하면 되겠다
오래된 계단을 오르다 보면,
그 규모가 눈앞에 펼쳐진다
망일루 앞에는 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고증을 바탕으로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이곳이 단순 관광지라기보다는
삼도수군을 통제한 곳이란 걸 알려주는 듯했다
작동된다고 가정하면,
포가 얼마큼 날아갈지 궁금해졌다
종합안내도와 관람 안내도가 적혀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곳이므로,
관람 안내도에 따라 관람한다면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망일루 아래엔 유리관 안에
삼도수군통제영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수항루
수항루의 모습이며, 실제로 올라갈 수 있다
수항루는 2층 누각으로 통영성 남문 밖에 위치하였는데,
임진왜란의 승전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3년 (1677년)
제58대 윤천뢰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수항루는 봄가을군점(수조)때에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받는 행사를 거행해왔다.
해안매립으로 인해 선착장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려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하였다.
라고 적혀 있었다
증강현실로 이곳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귀찮아서 안 해봤다
과연 뭐가 나올지 궁금하긴 하다
좌청
좌청은 당시 모습을 재현한 방과
의복들이 있어서 기념 촬영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건물로
대변좌청이라고도 하며, 제54대 신여철 통제사가
1689년에 좌청과 우청으로 분청 했다고 한다
입구 근처에서 당시 군인들이 대기한 걸 보면,
초소 같기도 하고, 내무실 같기도 했다
이곳에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면,
어느 정도 관직에 올라야 가능하지 않았을까
두룡포기사비
좌청에서 오른쪽을 보니, 비석들이 보인다
통제사비군인데, 세병관 옆에 위치해 있다
두룡포기사비인데,
다른 비석들과 달리 보호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두룡포기사비
두룡포에 삼도수군총제영을 설치한 제6대, 제9대 이경준 통제사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사적비'로 인조 3년 (1625년)에 제19대, 제25대 구인후 통제사가 세웠다.
구룡포는 원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경준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옴으로써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이 비석은 받침대 없이 비신과 머릿돌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비문은 창원대도호부의 부사였던 박홍미가 지었다.
비문은 아랫부분이 마멸되어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그 내용은 확인된다.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함께 통제사 이경준의 약력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하늘을 오르며 하나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 비석은 원래 통제영의 영문 자리에 세웠던 것을 190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비석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두룡포에 진영을 설치한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선조 때 통제사 이경준 (제6대, 제9대 통제사)이 세웠다.
그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또 진영을 설치하여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여
사람들이 그 이로움을 잊지 않고 그 덕을 생각하며 돌에 그의 업적을 기록하여 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현직의 통제사 구공(제19대, 제25대 통제사)에게 하소연하였다. 구공은 일찍이 공의 보좌관으로
있을 때 공에게 신임을 받고 또한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그 기록을 빛내고자 나에게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 그 대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은 옛날 정승을 지냈던 증의 아들이며 한산 목은공의 후손이다.
가문이 흥성하였고 세상이 전해진 덕의 무성함이 나라의 역사에 올려져 있고, 묘비에도 새겨져 있으므로
이 비문에서는 대략을 생략 한다 공의 형제는 다섯 분인데 함께 나란히 세상에 드러났다.
한 분은 현재 지사인 경함이니 쌓은 덕과 높은 명망이 당대 제일이다.
또 한분은 좌랑을 지낸 경류인데 임진란에 죽어 나랏일을 뜻대로 펴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겠다. 또 한분은 현재 소윤인 경황인데 비록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지는 아니했지만,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여 여러 분 내직, 외직으로 옮겨 다니며 벼슬을 하여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공은 비록 무예로써 몸을 일으켰으나, 경서와 사기에 두루 통하였고 시와 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온화한 용모에서는 옛 선비장수의 기품이 있어 평안 절도사를 두 번 지냈고, 황해절도사도 두 번 지냈으며,
충청병사를 한번 지냈다. 병사와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공경하였고, 그를 신명같이 위엄 있게 느꼈다.
그가 다스리는 지경은 편안하고 무사하였고 그의 어짊과 위엄과 일을 처리해 나가는 솜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정에서 거듭 나라의 요새지를 맡겨 두 번이나 통제사로 삼았다.
통제사라는 직책은 전라, 충청, 경상 삼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지키는 것으로 병권을 맡은 자리이고 무거운 소임이어서
당대의 으뜸이 아니면 능히 맡지 못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통제사를 두게 된 것 역시 오래되지 않았다.
임진란 때 이순신이 바다 위에서 적은 병사로 큰 적을 무찔러 적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시킨 큰 공을 세웠다.
조정은 관직으로서 그에게 상줄 만한 것이 없었고, 또 중요한 권한을 주지 않으면 병사들을
통솔하여 나라를 방어하기 어려우므로 특별히 통제사라는 관직을 만들어 그에게 내려 주었다.
통제영은 처음에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있고 멀어서 고성으로 옮겼는데, 배를 숨기는 데는 편하였으나
갑자기 당하는 변을 막는 데는 불편하였다 통제사로 오는 사람들이 우선 편한 것만 생각하여 능히 고치지 않고 두었는데,
공이 통제사가 됨에 미쳐 개연히 마땅한 땅을 측정하여 진영을 두룡포에 옮기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판데목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였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도적들이 이곳을
지나지 못하였다. 난이 끝나 바다가 잔잔해진 것이 수십 년이 넘었다.
옛날 조적이 초성에 진영을 옮기니 후조가 가까이 오지 못하고, 유익이 면구에 진영을 옮기니 북로가 지리의 험난함을 살피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천연의 오새라 할지라도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국방의 요충이 되는 것은 예나 이제나
같은 것이다. 두룡포가 옮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한낱 소금기가 많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바닷가 항구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잡초 우거진 언덕으로 몇천 만년 동안 몇천 몇백 사람들을 겪어 오다가 비로소 공의 손에서야
이루어졌다. 하늘이 이 오새를 설치하고서 때를 기다리고 또 사람을 기다린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충무공이 앞서 적을 파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을 세웠고 공이 뒷날 진영을 설치하여 만세토록 이로움을
주었으니 전후 두이씨의 출현이 때를 맞추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유독 공의 행적이 거의 허물어져 전하여지는 것이 없는가,
어찌 현명한 자손이 능히 집안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아, 두룡의 험한 땅이 공을 만나 국방의 요새지가 되었고, 공의 공적과 덕이 또 구공을 만나서 비석에 새겨 전하게 되었으니,
단지 땅만이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사람도 또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니, 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구공은 본디 중신의 친척으로 이 진영을 맡게 되니 그 공명과 사적은 공이 현재 통제사로 있고 또 이러한 일들을
주관하였으므로 감히 찬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고 뒷사람이 논하기를 기다리노라
통운대 부창원 대도호 부사 박홍미 찬
어모장군행 훈 ㅁㅁㅁㅁㅁ ㅁㅁㅁ ㅁ
천계 5년 (1625년) 3월 일
고종 갑진년 (1904년)에 본군 사람 이학재, 이승주가 바닷가로부터 세병관 광장에 옮겨 세웠다
비석 하단부가 마모되어, 마지막엔 정확한
이름이 파악되지 않은 것 같다
비석들을 모아 놓은 곳
두룡포기사비와 수항루 사이엔
비석들을 모아 놓은 곳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비석 24기는 전의 이 씨 문중 배출 삼도수군통제사 14명 중 9명의 것이다.
2014.11.7 통영시 무전동 873번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로
매몰 이유도 불명확하다. 내용으로는 사적비, 청덕산정비, 영세불망비가 각각 5기,
거사비, 선정비, 유애비, 유애거사비가 각각 2기, 불망비가 1기이다
라도 쓰여있었다
어떤 이유로 한 곳에서 발견되었는지 몰라도,
대단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수항루는 임진왜란의 승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조 숙종 3년 제57대 통제사인
윤천뢰가 건립하고 숙종 35년 제74대 통제사인 이홍술이 개건하였으며
그 후 영조 31년 제26대 통제사인 이장오가 확장 증건 하였으나 일제 때 훼철되었다
수항루의 앞마당은 병선마당이라 불렀는데 행사를 하면서 왜병으로부터 항복받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역대 통제사와 많은 시인묵객들이 사정을 나누기도 하던 곳이다
수항루는 본래 지금의 한일은행 부근에 위치하였으나
이 일대는 건물이 밀집된 번화가이므로 부득이 통제영 본관이던
세병관 경내에 복원하여 극일흔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라고 쓰여있었으며, 뒤에는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수항루다
세병관을 향해
중앙 계단으로도 갈 수 있으나
좌청을 정면으로 보면, 오른쪽 뒤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어 올라간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석인이다
돌로 만든 사람이란 뜻으로써
모아이 석상처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숙종 27년 (1701년) 제77대 류성추 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흔적만 남은 석인도 있다.
모습이 돌하르방과 비슷하다
크기도 조금씩 다르고,
표정도 다른 것 같다
비슷하면서도 같은 모습의 석인들은
지금 세병관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 곳에 모아 전시해 두었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그 자체로 웅장함과 함께 궁궐 건축의
단청을 하여 격을 높였다. 이는 삼도수군통제사에게
부여한 막강한 군권보다 우위인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1605년 (선조 38) 7월 최초 건립하였다.
크기는 현대 이전의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
큰 규모에 속한다
이순신 장군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으나
세병관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 생겼으므로,
실제로 세병관에서는 근무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작전 본부이기도 했고,
핵심 시설로 군사 시설로 사용되었기에
이곳을 방문할 이유는 충분했다
보자마자 압도적이다라고 느끼진 않았지만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큰 축에 속하였고
일제 시대때, 다른 건물들은 헐렸지만
세병관만큼은 남아 있었다 하니,
그 가치가 느껴진다
국보인 건물인데도, 신발만 벗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눈으로 구경만 할 줄 알았는데,
이곳을 들어갈 수 있다니 말이다
오래된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다
조선시대였다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곳에 들어와서 올라오지도 못했을 텐데
지금은 신발만 벗으면 큰 제약 없이 올라설 수 있다
물론, 지켜야 할 에티켓은 있다
고성방가, 풍기문란, 취식행위
눕거나 뛰어다니는 행위
궐패단 무단 출입행위
흡연, 낙서, 오물투기 행위
애완동물 동행 및 반입
이곳이 임금의 궐패를 모셔놓은
궐패단이다
올라가면 안 되는 곳이다
궐패단이란?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를 행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다
천장을 바라보니, 여러 무늬가
넓은 천장을 수놓았다
무너지지 않게 지지하면서도,
디자인 요소를 잃지 않은 느낌이 든다
세병관 뒷부분을 보니,
수많은 문과 기둥이 보인다
이곳을 거닐었던 장수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세병관 정면에서 바라본 통영 시내
지금은 여러 건물들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곧바로 바다가 보였을 것이다
세병관을 뒤로하고
세병관을 등지고 왼쪽의 문으로 나간다
좌청과 두룡포사기비에서 봤던 비석들이다
통제사비군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 관, 민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인데, 표지도 송덕비, 추사비, 거사비, 사적비, 불망비, 타루비, 유애비, 선정비 등으로 다양하다.
그대로 나간다면, 내아군 건물로써
병고, 운주당, 경무당, 내아, 주전소를
볼 수 있는 곳인데
내부를 좀 더 돌아보기로 한다
세병관 뒷길로 오니, 여러 건물들이 보인다
실제로 세병관을 제외하고 모두 복원한 곳이라
세월의 느낌은 없지만 복원한 만큼
어떤 건물들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볼 수 있다
건물이 없는 곳은 나무와 잔디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뒤에서 세병관을 바라보니,
태풍 송다의 영향일까?
바람이 불어주어서, 후덥지근한 날씨임에도
불쾌지수가 내려가는 것 같다
폭포와 연못을 꾸며 놓은 것 같은데,
물이 흐르지 않아 그 흔적만 남아있다
듬성듬성 복원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백화당
길 끝에선 백화당 건물을 만날 수 있었다
디귿자 모양으로 생긴 건물이다
백화당
선조 36년 (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 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도 맡았으며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
건물과 건물들 사이로 통영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공내헌
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
총방 입자방
총방 : 말통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들던 곳
입자방 : 혹립이나 벙거지, 삿갓, 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
그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있다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샘플들을 볼 수 있었다
선자방
세병관 뒷길로 오다 백화당을 만났을 때,
오른쪽 위를 보면 언덕에 있는 건물이었다
누군가 부채를 놓고 간 걸 보니,
잠시 앉았다가 잊어버리고 간 것 같다
2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 안에 특별하다 하는 건 없었다
다만 정면을 볼 때,
오른쪽 건물엔 광주리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어떤 용도인지, 판매용인지 잘 모르겠다
선자방
단오절에 임금이 하사하던 부채를 제작하였던 공방으로 부채의 형태에 따라
단선과 접선 그리고 별선으로 구분하였다. 1894년 "통영지"에 진공품 (진귀한 공물) 중
부채가 800개로 기록되어 있어 통영에서 대규모로 부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공방
선자방에서 내려와 백화당으로 오고,
조금 더 앞으로 가면, 12공방이 나온다
앞에 보이는 곳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것 같은데,
사진 촬영 금지여서 그런 곳이 있다고
표시해 둔다
디귿자 모양으로 이뤄진 12공방
하나의 기지와도 같은 곳이라 그런지
온갖 제품들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12공방
제반 군기와 진상품을 생산하였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군수품 생산과
민생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조정에 진공품과 때로는 중국 가는 사신의 헌 상품까지도
조달하는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 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변방에서
각종 군수품을 자체 조달 목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한산진에서 시작하였으나 (1593년)
임진란 이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생산했다
화자방
12공방 주변을 보니, 또 다른 건물이 있다
건물도 많은데, 하나하나 역할이 다르다니
그것 또한 볼거리였다
화자방
가죽을 사용하여 군화와 말안장을 만들던 곳으로 화자는 벼슬아치들이
관복 아래에 신는 가죽으로 만든 긴 장화 모양의 목화를 말한다
동개방
활과 화살을 함께 꽂아 넣어 등에 지는 가죽 주머니인 동개와
활을 허리에 꽂는 궁대를 만들던 곳이다
석수조
물을 저장하여 자개 등을 갈고닦는 등의 작업을 하던 곳
마실 물은 아니지만, 작업엔 꼭 필요한 물이므로
이렇게 저장소를 만든 것 같다
깊어가는 여름
석수조를 등지고 밖을 바라보니,
지금은 조선 시대가 아닌 21세기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2002년 영화 타임머신을 보면,
주인공은 타임머신에 앉아 있지만 주변 환경은
계속 변하는 장면이 있는데,
지금이 그와 비슷한 것 같다
조선 시대에 있지만, 그 주변은 시간이 흐르는 느낌
앞서 봤던 화자방의 뒤를 보니,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제대로 관람했다면, 지금 관람한 만큼
시간을 더 써야 했을 것이다
들어온 게 아쉬우니 조금 걸어 보니,
투호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보였다
공록당
공고에 딸린 집무 공간
오른쪽에는 공록당이 있었다
길의 끝을 가니, 다른 건물들과 달리
문이 굳게 닫힌 건물이 보였다
소목방
나무로 가구 및 문방구 등을 만들던 곳
통영엔 나전칠기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예부터 제대로 만들어 온 것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 멀리 새로 짓는 강구안의 다리가 보인다
왼쪽 위의 산엔 남망산에 있는 대극장이 보인다
줌을 당겨서 보니,
저 멀리 바다 건너엔 스탠포드 리조트 앤 호텔이 보인다
아침엔 구름 잔뜩 낀 하늘에 간간히 햇빛이 보였는데,
점심이 넘어가니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여름의 절정에서 보는 푸른 하늘,
푹푹 찌는 더위가 가고 나면 선선 해 지는 기온을
미리 만나 보는 것 같다
세병관은 역시 이곳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마치 경복궁의 경회루를 보는 것 같다
푸른 바다가 저 멀리 보이고,
산과 어우러 지니, 다른 지역에서 와는 다른
통영만의 멋이 느껴진다
실제로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충렬사가 있는데, 백석 시인이 그 계단에 앉아서
통영2를 썼는데, 그중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고
썼던 이유가 아마 이런 풍경을 보고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 멀리 동피랑이 보인다
통영을 돌아보니, 지형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니
어떤 구조를 갖췄는지 이해가 된다
이제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고,
조선 시대와 지금 시대를 한 번에 보고
한가롭게 풍경을 봤던 세병관을 지나
마지막 코스로 이동한다
실제로 조금 더 둘러봐야 하지만,
시간상 모두 볼 수는 없었다
내아군
석인이 있던 문을 지나 내려온 곳
내아군이다
내아군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영역이다.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하며 세병관 동쪽에 위치한다.
내아군 내에는 운주당과 이순신 장군의 영당이자 관사인 경무당이 자리하고
그 우측으로 살림채인 내아가 자리한다.
중앙의 관아와 달리 지방의 관아에서는 관리의 식구들이 살림하는 내아가 있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공존하는 특징이 있는 곳이다.
내아군을 들러봤어야 했지만,
실제 들어가진 않고, 바로 옆의 문으로 나간다
의외인 것은 이 문이 열려 있어서, 매표소를 지나
이곳으로 그냥 들어오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매표소에서 직원이 상주하고 있으므로
그 앞을 지나갔는데도 내려오지 않는다면,
분명 찾을 테지만 말이다
통영의 중심지에 있는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은
겉으로만 둘러보기엔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눈으로 보고, 느끼며 거닐다 보면
생각을 잠시 멈출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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