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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를 만나다

by G-Kyu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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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오죽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가 있다

1991년에 발표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여러 의견이 있지만 상식선에서 대표 인물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노래로 만들어서 알 수 있다

 

그중 신사임당 오죽헌이라는 가사가 있었고,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은 워낙 유명한 모자지간이어서,

살면서 한 번쯤은 그 역사의 현장을 가보고 싶었다

 

대표적으로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만큼

검은색 대나무를 보고 싶기도 했다

언제쯤 코로나의 현 상태가 추억이 될까?

좀비 영화처럼 모두가 바이러스를 보유한 것일까

적어도 감염자와 접촉하면, 감염되는 건 맞는 것 같다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역사의 현장을 가게 되었다

성인의 입장료는 3,000원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곳이고,

건물로써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궂은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오죽헌은 주변 경관을 잘 정돈해 놓았다

오죽헌을 향해 가는 길에 정원도 만들어 놓았다

산책로도 있어서, 단지 오죽헌 건물과

대나무만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된다면, 그 주변을 돌아 볼 수 있었다

여성 인권이 거의 없던 조선 시대에

신사임당이 역사적 인물로 알려진 걸 보면,

대단한 위인임에 틀림 없다

 

신사임당이 그렸던 그림을 바탕으로

실제 채소, 식물들을 심어 놓았다

위 사진은 가지다

과일인 수박도 있었다

아직 피어나진 않았지만,

맨드라미도 심어져 있었다

양귀비는 이름만 익히 들었던 꽃인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정확히 이름 모를 식물이지만,

이제 점점 색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오죽헌 입구 

오죽헌이 들어가기 전,

안내도와 오죽헌이 어떤 곳인지 설명이 있다

생각보다 크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사진상으로 4번이 오죽헌(몽룡실)이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고, 율곡 이이가

6살까지 공부했던 마루방이 있다

강릉 오죽헌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최응현에서 외손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정화 사업 때
강릉시로 이관되었다 경내에 율곡 이이의 사당인 무성사와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과 율곡 인성교육관 등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5만 원 권과 5천 원 권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과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 예술가이다 자수, 시문, 그림 등 여러 방문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생존 당시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초충도], [산수도], [묵포도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림, 간결하고 다정한 필치의 [초서], [전서] 등의 글씨, [사친], [유대관령망친정] 등의 
한시가 전한다

이이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에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호조좌랑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을 지내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천도책], [성학집요], [격몽요결], [학교모범] 등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이는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를 뵙기 위해 자주 강릉을 다녀갔다

라고 쓰여있다

입구인 자경문을 통해 들어간다

자경문은 오죽헌의 안팎을 가르는 문이다
율곡은 어머니를 여읜 후 금강선에 들어갔다가 유학에 뜻을 두고 일 년 만에 돌아왔다
그때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의 <자경문>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문은 '강릉 임영관 삼문 (국보 제51호)'과 같은 모양으로 1976년 4월에 건립되었다

 


자경문

입지 : 성인이 되고자 쉼 없이 노력한다
과언 : 마음을 정하는 데는 먼저 말을 적게 한다
정심 :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여 바르게 한다
근독 : 매사에 공손하며 삼가고 조심한다
독서 : 독서, 공부에는 생각이 앞서야 한다
금욕 : 재산과 명예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진성 :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한다
정의 : 천하경영에 억울한 희생이 없어야 한다
감화 : 아무리 포악한 사람이라도 감화시킨다
수면 : 때가 아닌 잠을 자는 것을 경계한다
용공 : 수양과 공부는 서두르지 않고 계속한다

이름 모를 나무가 있었다

마치 사슴뿔처럼 멋있게 자란 가지가

이파리가 없어도 멋을 뽐내고 있었다

안내판이 있어서 팸플릿이 없어도

안내판을 따라가면서,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다

오죽헌을 향해 들어가는 곳

입구엔 강릉 오죽헌이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었다

건물만 멋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나무와 꽃이 이곳을 더 멋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곳곳에 서 있는 기념비는 이곳이 

가치가 있는 곳이란 걸 알려주는 것 같다

 

오죽헌

문에 드러 선 뒤, 왼쪽이 오죽헌이다

들어갈 수 없도록 해 놓았으나

이곳이 유명한 그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작아서, 정말 이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오른쪽 검은색 바탕에 흰 글자는

몽룡실인데,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곳이다

왼쪽 방은 율곡 이이가 6세 때까지 공부했던

마룻방이다

주목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오죽헌의 왼쪽 방

즉, 율곡 이이가 공부했던 마루 방에 쓰여있는 글

오죽헌 중앙에 있는 문구

문성사

율곡 이이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계단을 통해 올라가 볼 수 있었다

계단이 올라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강릉 시내가 보인다

 

이 당시에는 모두 산이었겠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산은 그 자리에 있으므로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이 봤던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오죽헌은 대궐 같지 않은

아담한 크기의 건물이다

율곡 이이의 영정

눈으로 보면, 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봐왔던 모습이다

오죽헌이라고 특별한 모습의 영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검은 대나무

주변은 검은 대나무로 뒤덮여있었다

처음엔 죽은 나무 같기도 하고, 

일부러 검은색을 칠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먹물을 뿌려 놓은 듯

비를 머금은 대나무는 그 색이 더 짙어 보인다

오죽헌에서 오른쪽으로 나오니,

안채, 사랑채 안내판이 보인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다가 오죽한 정화사업으로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공간이고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공간이다 사랑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도 

오죽헌과 비교했을 때 이질적이지 않다

내부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다

주인이 없는 집이라 그렇지

남의 집을 이렇게 샅샅이 볼 수 있을까

건물 내부엔 율곡 이이의 책 중 하나인

격몽요결의 일부가 적혀있다

약간만 리모델링하면, 개량 한옥으로써

꽤 괜찮은 모습과 크기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싸리나무가 심겨 있었다

싸리나무의 효능이라고 자료가 있는 걸 보면,

단순히 관상용으로만 쓰이는 나무가 아니었다

다시 만난 검은 대나무

홍학 (플라밍고)의 다리처럼 보인다

아마, 검은색이 아닌 분홍색이라면

더욱더 비슷했을 것 같다

 

어제각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보았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 어제각이다

이 안에 벼루와 옛 5,000원권이 있다

율곡 이이의 벼루와 그 뒤에 정조의 글이 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를 직접 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벼루 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며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어명으로 지었다고 해서 어제각이라고 부르며 벼루 뒷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 어필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내어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품이여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 남아 있구려

오천원권 지폐에 오죽헌과 벼루가 도안되어 있습니다

모란이 심겨있었다

안채와 바깥채를 뒤로 하는 걸 보니,

오죽헌을 거의 다 둘러본 것 같다

여전히 각 종 수목이 있어,

보기에 아름다운 곳이다

조금 더 자세히 둘러보는 관광객

새로 들어온 관광객이 섞인 오죽헌

오죽헌엔 박물관도 함께 있어서,

이곳을 나오면 박물관도 둘러볼 수 있다

나가기 바로 전,

5,000원권을 찍은 포토존이 있었다

그 위치에서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 본다

5,000원권의 느낌은 안 나는 거 같지만

그래도 각도상 이곳이라고 하니

비교해 가며 찍어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줌을 더 당겨 보기도 하고,

최대로 당겨 보기도 한다

박물관을 대충 둘러보고, 다시 출구로 간다

이곳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반나절 정도는

할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넓고, 볼 것도 많다는 생각이다

봄비가 내리는 오죽헌의 풍경은

맑은 날 보다 고즈넉한 느낌이 있다

조금 더 둘러보면 좋았겠지만,

이제는 일정상 나가야 했다

율곡 이이의 동상이 있고,

주변엔 신사임당의 동상도 있었다

 

같은 인생을 살고 있으나 이렇게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위인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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