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18일 목요일 날씨 : 맑음
어제는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축구 경기가
이란의 홈에서 열린 날이다
사회에 있었다면, 시간 맞춰놓고 축구 경기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감금 비슷한 수준의 현실에서 티브이를 보는 것보다
하루빨리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더 큰 밤이다
조교들이 밤 10시 50분쯤 환호성을 지른다
한 골 넣은 것인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천수가 넣은 골이었고
결과는 1:0 한국의 승리였다
그 한골은 한국 시간으로 오후 10시 30분쯤 넣은 것이고,
경기에 승리하자 조교들이 환호성을 지른 거 같았다
전반에 골키퍼와 1:1 상황에서 이천수는 칩샷을 노렸으나
골대 맞고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후반에도 같은 찬스가 있었고 그걸 성공시켰으며
이란은 40년 만에 홈에서 패배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21세기를 산다고 했던 때인데,
20세기건 21세기건 현실은 티브이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앞으로 약 2년 4개월을 통제 속에서 지내야 하는 삶이다
기술학교의 끝을 보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모든 시험이 끝이 난다
이 뜻은 기술학교에 있을 날도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고,
훈련소 이후 정착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과연 어느 곳일지 아직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추후 생각해 보건데, 훈련소 때 헤어짐은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들과 이별하는 느낌이라면
기술학교의 헤어짐은 대학 졸업식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이별보다는 나 혼자의 졸업식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학창 시절은 끝내고, 사회로 나가는 느낌처럼
이별 보다는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그 마음이 더 컸다
오늘 2교시는 시험 시간이다
필기시험인데, 8개가 과락인 시험이다
시험은 필기와 실기 모두 있으므로,
어느 것 하나 소흘이 할 수 없다
동기들끼리의 소문에는 기훈단 성적이 70%,
기술학교 성적 30%가 반영되어 자대가 결정된다는데
이게 누구에게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기에
온전히 믿을 수 없는 뉴스였다
기술학교 때 시험을 망쳐도 실망하지 말라고 만든 말인지
기술학교 때 시험 잘 봐도 역전은 없다는 말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정말 그런 건지, 거짓 소문인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열심을 다 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학교 시험이라면, 배운 과목에 대해서 보겠지만
군인의 신분이므로, 군인이 알아야 할 것들도 시험을 본다
이를테면, 군인 복무규율이다
이것도 외우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단 한 글자도 생각이 안 난다
배우면서도, 현재 신분이 군인이면서도
군인인 것이 싫었던 때였다
봄의 교육사 풍경
내가 군인이라는 신분만 제외하면,
3월 중순의 기술학교 주변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외부에서 견학도 오는데, 민간인들에게 군대가 삭막한 곳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조경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물론 그전에 그곳에 살고 복무하는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만든 것이겠지만 말이다
계절을 타지 않는 침엽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군데군데 개나리도 이제 피려고 몽우리가 졌고,
벚꽃 나무도 이제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3월 특유의 추움과 따뜻한 햇살이 어우러지고
4계절 내내 변하지 않는 풍경과
계절을 알리는 꽃나무들이 뒤섞여 있으니,
군인의 신분인 것 빼고는 다 좋았다
앞으로 살면서 이곳의 풍경을 다시는 못 볼 수 있으니,
눈에 많이 담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정판 과도 같은 이 시간의 풍경을 눈에 담아 두었다
어쩌면 행운일지 모르겠다
겨울에 입대해서, 무덥지 않은 이 시간에
봄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는 건 말이다
점심 식사는 닭개장, 채 장아찌, 캔디바, 우유
여전히 부산 우유인데도 적응이 안 된다
오후 학과 시간은 F-16 학과장에서 했다
5,6교시는 전직 대령의 안전사고에 관한 강의였는데,
그렇게 졸릴 수 없었다
사회에서는 반신욕이 유행이라는데,
이렇게 나른한 봄 날에는 반신욕을 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군대 와서 안전사고로 인해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입대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고
사고를 당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만약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일은
아무 의미 없으므로, 다치지 않길 바라고,
실제로 다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하는 것 밖엔
별 다른 수가 없다
지금은 재특내 기간이다
흔한 말로 풀어줬더니 막 나간다고 생각한 조교들이
통제하고자 다시 특내를 시작한 것인데
군대 특유의 레퍼토리다
너희 같은 기수는 처음이다
여태 이런 기수는 없었다
어려운 거 안 시키잖아? 지킬 것만 지키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해?
이유야 붙이기 나름이니, 그 이유가 맞다 해도
현재 상황은 결과적으로 특내 기간이니,
변하는 건 없다
앞으로 잘해야지라는 다짐도 필요가 없다
싫든 좋든 다음 주면 기술학교도 끝이니 말이다
특내 기간이라 아쉬운 것은 회식 혹은 배식하는데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내 기간이 아니라면, 오늘 회식하는 건데
회식이라고 해 봐야 월급에서 얼마 빼서,
정해진 과자와 군것질 거리를 받아먹는 날이다
나름대로 20대 초반 자유를 통제당하고 고생하는데,
이걸 알아주는 건 통장밖에 없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그 금액을 보면 처량 하기도 하다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마음대로 인출도 못하고,
돈이 있다 해도 마음껏 사 먹을 곳도 없다
다만 군것질 리스트가 적힌 작은 용지에
내가 먹고 싶은 걸 체크하고 제출하면
그걸 내무실에서 먹는 것이다
그러나 특내 기간엔 이런 걸 하지 못하므로,
컵라면이나 주면 다행이겠다 생각했다
불행히도 컵라면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과자를 먹거나 컵라면을
먹었어야 할 이 시간에 모두 수양록을 쓰거나
편지를 쓰는 고요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나 또한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썼는데,
내무실을 둘러보니, 내무실 동기들의 별명과
그 모습이 묘하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1. 어니스트 (미국 배우인 짐 바니가 출연한 영화
어니스트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
2. 할배
3. 파리
4. 두꺼비
5. 비실이
6. 양키
7. 유치원생
8. 허 씨 (암황제)
9. 블랙죠
어렴풋이 그 모습들이 기억날 뿐이다
만약 사회에서 만난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른 지금
동기들의 얼굴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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